나이가 드니 죽는 문제가 이제 먼 이야기가 아닌게 됐다.
심심찮게 친지나 아는 사람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알지 못할 어떤 느낌이 실감되면서
나를 포함해서 다음은 또 누구 차례일까 의구심이 든다.
세상의 키워드도 웰빙에서 웰다잉까지 범위를 넓혀나간다.
그래서 바라는 소망은 한 가지, 그저 자식이나 배우자에게 민폐 안끼치고 자는 잠에 조용히 가는 것이다.
옛날 고승전을 읽다보면 도통한 스님들은 앉아서 할말 다하고 이웃집 놀러가듯이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한번도 그렇게 대단한 좌탈을 한 선지식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석가모니 부처님 조차도 사라쌍수 옆에서 모로 누워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찌보면 좌탈입망은 수도하는 사람의 로망을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몇년 전에 약국단골이던 허00 할아버지의 죽음이 생각난다.
늘 건강한 팔십대 노인이었는데 친척이 선물한 남미 열대지방의 차(茶)를 마시고는 덜컥 병이 들고 말았다.
신장이 망가져서 급기야 투석에 의존해 연명을 했더랬는데 그래도 점점 쇠약해져 입원도 하고
집으로 모셔 가양도 했었는데 몹시 편찮은 어느날 자기가 몇 일 몇 시 쯤 갈거라고 할머니에게 말했단다.
그리고 정확히 그 시간에 숨을 거두었다고 그 할머니가 약국에 와서 말해주었다.
자기 죽음의 시간을 예언하는 경우는 가끔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그야말로 도가 높아서 그런 눈이 열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럴 수 있고 그것은 우리 이성의 영역 다음으로 있는 정묘영역의 일이다.
정묘영역의 발달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쪽으로 많이 발달한 사람들이 바로 무당이나 예언가 등이다.
이 정묘영역은 의식의 발달 과정에 있는 일부분의 영역으로 수행에서는 여기에 빠져 발달을 멈추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점치는 재미에 빠져 정작 우리 삶의 목표인 완전한 해탈 즉 행복을 까맣게 잊어 버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부 도중에 엉뚱한 길에서 재미에 빠져 한세월 보내는 일이 허다하다.
좌탈입망 그것도 그저 그런 한 가지 재미에 불과한 것이련가?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지금의 상태는 어떠한지 그것이 항상 우리가 들여다보며 궁구해야하는 점이다.
알고보면 삶의 본질 그것이 결국 죽음의 본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