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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심

만덕이2 2022. 6. 2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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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꿍심이 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다.
누구를 구속했다 풀어주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인임을 깨달아 진정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게 뭐가 꿍심이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누구나 스스로를 속박하는 구조속에 있는게 보이는데,
이 구조속에서 그를 해방시키기란 생각 보다 그리 쉽지가 않다, 그래서 서두르지 말라는 뜻으로 꿍심이라 했다.
이는 심지어 가족들에게 까지 꿍심이 되어있어야지 까놓고 덤비다간 괜한 분란만 일으키고 별 소득이 없다.
그래서 가만히 옆에서 돕기만 할 뿐이다. 언젠간 스스로 그런 마음의 구조에 관심이 생겨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란 스스로를 바라보고 점검하는 작용을 누구 할 것 없이 갖고있다.
요즘은 "메타인지"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좋으면 좋은 것을 알고 화가나면 화가난 줄을 안다.
그 화가난 줄을 아는 마음은 더 이상 연속적으로 화를 생산하지 않지만 이 마음을 깜박 놓치면 우리는 그만 화에 함몰되어 화가 무한루프에 빠진다.
이런 구조를 보는 연습을 하는게 위빠사나 또는 사티 수행이라 한다.
이 초기의 수행방법은 동남아 등지에서 유행하는 수행방법이다. 꼭 거기가서 배울 필요는 없고 누구나 지금 이자리에서 할 수 있다.

이 구조를 들여다 보기 만으로 크게 헐떡거리는 마음을 대략 진정시킬 수는 있다.
그렇게 꾸준히 연습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연습하는 주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차츰 우리의 삶 전반을 들여다보는 의정이 되는데 이제부터는 스스로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먼저 그 길을 간 선지식이나 선험자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늘 스스로 궁금증이 속시원히 해결 되었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선지식의 체험이나 말을 자기 체험처럼 빙의(?)가 되는 수가 있다.
또는 많은 어록을 보면서 숱한 관련지식을 자기 살림으로 삼아 이른바 지해(知解)의 샛길로 빠져버리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활달한 자유인이 되는게 목표이지 남 앞에서 잘난체 하는게 목적이 아니다.
그런 샛길로 빠지는 오류들을 넘어서면 비로소 마음이 힘을 얻는다. 이제 부터는 선지식의 어록을 주체적으로 소화할 능력을 갖추었다.
많은 앞서간 사람들로 부터 견해를 보고 배우며 점점 마음의 힘이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의 힘이 커질수록 점점 나와 모든 존재들의 실상에 대한 통찰도 깊어진다.
이렇게 깊어진 통찰을 통해 어느듯 앞서 말한 의정이 해소되는 순간이 있다.

의정이란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의문이다.

간단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해소되지 못한 상태는 부단히 해소되는 쪽으로 시도되고 움직인다.

마음이, 우리가, 삼라민상이 원래 그렇게 움직인다.
이 의문이 해소되는 그 곳이 바로 자유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자 마지막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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