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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연기법으로 그간의 의문을 끝냈다.
이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 연기법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벗어나버렸다.
언제 부턴가 불교는 참선을 주된 수행방법으로 여기기 시작하여 여러가지 참선 방법(요령)을 전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다시 세월은 흘러 요즘의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의 소식은 잘 들리지 않는다. 왜그럴까?
삶의 문제에 특정한 방법만이 해결책일 수는 없다.
연기법이든 참선이든 아니면 또다른 종교의 수행법이든 모두 다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이 현상과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해득하여 갈등없이 삶을 영위하려는 것이지
어떤 수행을 실천하여 높은 계위에 오르거나 그간 없던 신비한 능력이나 세계를 체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스스로 점검해봐서 자기는 어느쪽인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길이다.
해탈이 까딱 잘못하면 해달놀이가 되어 버릴 수 있다.
연기법은 전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의문으로 시작한다, 의문을 하기위해 자리잡고 앉는게 아니다.
그저 궁금하다. 그 궁금함은 진지하다, 왜냐하면 바로 자기 삶이니까.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는 많은 의문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씩 풀리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궁금함이 벽에 부딪히더라도 샛길로 빠지지 않는다, 아니 샛길로 빠지더라도 곧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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