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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

만덕이2 2022. 8. 2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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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거울을 보니 참 많이 늙었다.
아는 사람들이 나이에 비해 동안이니 어쩌니 말해줘도 오늘 문득 거울 속의 나는 영락없는 칠십노인 그 뿐 다름 아니다.
낡은 기계와 새 기계들이 섞여서 돌아가는 인간세상이 그 자체로 허망하다.
이 허망함을 부정할 수가 없다. 어딘지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 뒤지고 또 뒤져봐도 정말 없다.
그래도 공평한 것은 누구나 똑같이 그렇다는 것이고 처음부터 늙지 않았고 누구나 젊고 싱싱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는 것이다.
그저 존재한다는 모든 것은 이 생주이멸의 과정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늙는 건 그렇다 쳐도 내 자식이, 손주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처럼 세월에 상해가는 것을 보는게 즐겁지는 않다.

어쩌면 이건 순전히 태어난 자로서의 보는 관점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늙지도 않을 텐데 병들지도 않고....
그 옛날 석가모니도 같은 생각을 했단다. 태어나는 것은 순전히 애착 때문이고 그건 또다시 무엇 때문이고....등 등
이렇게 해서 도달한 최후의 결론은 무명 때문이란다. 무명(無明).
그러면 무명은 대체 왜 일어날까? 우리의 본성은 당연히 밝은 지혜가 겸비해 있거늘 어찌 무명에 떨어질까?
나의 결론은 무명 또한 본성인 진여의 작용이라는 것.
부처님이 모든 중생이 부처라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중생놀음을 충실히 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말은 그 근본이 부처라는 뜻도 되고 이는 중생, 부처를 나누기 이전의 부처를 말한다.
우리는 중생놀음을 하는 이 모든 활동들이 오직 진여의 묘용 즉 성품의 작용(性起)일 뿐이라는 것이다.
진여의 이 중생놀음이야 말로 부처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순간인 것이다.

태어난 자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반드시 태어난 자 만은 아니지 않은가?
이 부분은 좀 더 천천히 나아갈 필요가 있는데, 잘 하면 우리는 태어난 자의 관점을 벗어날 수가 있는데,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본질적으로 말고 바로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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