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그림그리기를 시작하고 이제 서너편의 따라 그리기를 완성했다.
그려보니 그려지는게 신기하다. 다른 명작들도 몇번 따라 그려보고 통도사 극락암 풍경에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
오늘 오후 시간이 나서 피카소 그림들에 대한 인터넷 글들을 읽어 보였다.
그림을 자연에 대한 따라 그리기로 보는 관점과, 보이는 것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표현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자연이 100%라면 그림은 가장 잘 그리면 99%였다. 즉 자연에 대한 묘사나 모방이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는 방식도 대동소이해서 고전적인 회화기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인간 내부에 관한 성찰이 거의 없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르네상스 이후 부터 인간들은 자신의 사고나 이성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어서 비로소 주제의 다양성을 지향하게되었고,
이어지는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달로 인간 스스로에 대한 성찰은 그 깊이를 더해갔다.
이 때가 그림에서도 찬란한 황금기가 되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거장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이루어지고 많은 결과물도 얻었었다.
고호, 고갱, 세잔느, 마티스, 모네. 르느와르, 마네 등등 수 없이 많은 다른 얼굴들의 화가들이 각자 다른 그림들을 그렸었다.
이 실험들의 정점에 피카소의 큐비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후의 전개는 잘은 모르지만 현대미술은 좀더 깊어진 그림 그리는 행위에 대한 물음과 행위자에 대한 궁금증이 화두가 되었지 싶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인간이 스스로 관찰하는 그 행위는 과연 믿을만 하며 어떤 의미인지 되묻게 되고
이젠 그림을 떠나 인간 혹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더 근본적이 물음으로 귀착하게 되었다.
이런 물음을 추구하는 미술활동은 관객과 소통이 점점 멀어지고 더욱 추상화 되어갔을 것이다.
요즘 관객들이 현대 미술작품을 어려워하고 현대 이전의 작품들에 시선이 가는 이유 도 이런 소통의 어려움에 기인한다.
모르긴 하지만 나도 그림을 자꾸 그리다 보면 점점 내면의 추상적 개념 또는 특정 사물의 이미지화로 자연스럽게 변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가 되면 또 그렇게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 싶다. 얼마나 갈지는 나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