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이란 자기가 고픈대로 흘러간다.
밤이 고프면 밥을 찾아, 술이 고프면 술을 찾아 가듯이 각자 고픈대로 간다.
나는 무엇이 고팠느냐고 하면 삶의 근본이 궁금했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 당시엔 근본이 궁금한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진정 원하는 게 이거다 싶어 달려가 보면 뭔진 모르지만 어딘가 한 2% 부족했었다.
그래서 다른 걸 해 봐도 역시 100% 만족은 되지 못했다.
불교 학생회나 다른 수행 단체를 다녀봐도 어쩐지 겉도는 것만 같았다.
혼자서 책방을 이곳 저곳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늘 불교의 책을 언저리를 서성거렸었다.
지금 되돌아 보면 그게 모두 삶이란 무엇인지 이른바 '존재의 실상'에 대한 끌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끌림으로 끝내 깨달음을 얻게 되었지만 이 앎에 관한 말들을 함부로 꺼내지 않게 되었다.
내가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해 본들 아무런 득이 없다, 나에게도 그리고 듣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한 발짝 더 거리를 두게 되었으니 진정 소득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눈높이에 맞는 말이나 행동을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든다.
며칠 있으면 내 칠순 생일이 다가온다.
아이들이 호텔에 생일상(?)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피할 수는 없어 받긴 받아야겠다.
이제 아이들도 다 서른이 훌쩍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속 이야기를 해 볼까 하다가 다시 접는다.
내 속이야기는 앎(깨달음)에 대한 것이 전부인데 저들이 관심이 없을 터이니 괜히 저들 삶을 혼란스럽게 할 것만 같다.
켄 윌버도 괜한 저런 말들이 한 사람의 일생을 혼란스럽게 하다 못해 망칠 수도 있다고 경계하는 말을 했었다.
법우(法雨)가 곱게 내리면 씨앗이 싹이 트게하고 자라게도 하지만 폭우 처럼 내리면 오히려 싹이 떠내려 가버린다.
사람에게 이르는 말이 진정 어려운 까닭이다.
그래도 아이들과 대화하고 싶다.
조심스럽게 눈높이를 맞춰 법우를 내려주고 싶다, 70 노인의 지혜가 될지 늙은이의 자아도취의 헛말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꼰대 짓이 아닌, 진정 저들이 어드메쯤 오고있는지 마중가듯이 만나고 싶다.
인생이 한갖 꿈이지만 그 꿈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사실이 우리가 사는 하나 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꼭 내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 일이 궁금한 모든 이에게.